실치회
춘분(20일)이 지나니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내겐 반가운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한다. 충남 태안 마검포의 한 횟집에서 날아오는 봄소식이다.
지난해에는 3월 10일에 도착했다.
"봄이 왔어요! 기다리시던 실치가 나왔습니다."
올봄에는 지난 일요일(19일)에 알림이 떴다.
"실치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양이 적어 전화 후 오세요. 25일 쯤 정상적으로 나올 것 같아요."
매년 접하는 이 한 통의 문자에서 나는 봄을 물씬 느낀다. 그 느낌이 남녘의 꽃소식 못지않다. 봄의 싱그러움이 듬뿍 묻어나는 '실치'에 대한 혀끝의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갯내음이 듬뿍 담긴 봄철 미식거리가 있다. '실치'가 그것이다. 실치는 말 그대로 실처럼 가늘고 작은 물고기이다. 봄철 실치는 길이가 2~3cm 남짓, 혀에 닿자마자 특별한 질감 없이 그냥 스르르 녹아내린다. 실치는 이처럼 크기는 아주 작지만 봄바다의 느낌은 고래보다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3월 하순, 서해안의 봄기운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실치가 제철을 맞았다. 국내 실치회의 명소로는 충남 태안 마검포항, 당진 장고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실치는 3월 말부터 5월 하순까지 마검포항 인근 곰섬 앞바다에서 긴 자루 모양의 촘촘한 낭장망으로 잡아 올린다. 하지만 그물에 걸리면 곧 죽어버리는 탓에 어장에서 가까운 산지 포구가 아니면 횟감으로 즐기기가 힘들다.
올해는 일기불순 등의 탓으로 예년에 비해 조업이 일주일가량 늦어졌다.
이 대목에서 맛난 실치에 대한 작은 오해를 풀어야 겠다. 흔히 실치를 '뱅어'의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다. 실제 거의 같은 말로 쓰이고 있으니 크게 다를 바는 없겠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실치는 뱅어가 아니다. 실치는 베도라치의 치어다. 뱅어라는 물고기는 따로 있는데, 베도라치는 농어목이고, 뱅어는 바다빙어목이다. 뱅어는 주로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기수역, 강 하구에서 잡힌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환경오염 등으로 뱅어가 자취를 감췄고, 그 빈자리를 실치가 대신하며 이제는 뱅어와 실치가 혼용되고 있는 셈이다. 뱅어도 실치처럼 아주 작고 투명하다. 그래서 한자로는 白魚(백어)라고 쓴다.
뱅어는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던 생선 중 하나다. '동국여지승람' '성소부부고' 등 조선시대 고문헌에도 '국수처럼 희고 가늘어 맛이 좋다'고 언급 되어 있다.
한편, 실치회는 두어 달 동안 맛볼 수 있지만 요즘에 잡히는 것이라야 횟감으로 적당하다. 3월말 처음 것은 육질이 아주 연하다. 반면 5월 하순 이후에는 뼈가 굵고 억세져 뱅어포감으로 쓴다.
흔히 실치회는 야채와 실치를 양념고추장에 비벼 무침으로 즐긴다. 오이, 깻잎, 쑥갓, 양배추, 당근 등 야채, 그리고 갖은 양념을 섞어 만든 초고추장을 실치와 한데 버무린다.
부드러운 실치와 아삭한 야채의 질감, 매콤새콤한 초고추장이 어우러져 봄느낌 물씬 풍기는 별미가 된다. 특히 배를 채 썰어 올린 고명은 시원함을 더하고, 국수사리를 곁들이면 훌륭한 식사대용이 된다.
그러나 실치회를 맛볼 때에는 그냥 다른 소스 곁들이지 말고 먼저 한 젓가락 오물거려 볼 것을 권한다. 실치 본연의 맛을 더 잘 느끼기 위함이다. 자극적인 맛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게 갯내음도 은은하게 느껴지고 독특한 질감이 먹을 만하다.
실치요리의 또 다른 진수는 '실치 시금치국'이다. 국물 맛이 시원 칼칼한 게 뒷맛이 깔끔하다. 국속의 실치도 마치 게살이나 생선살을 곱게 갈아놓은 듯 부드럽다. 대체 그 어떤 조미료로도 이 맛을 내기가 힘들 성 싶을 정도다.
마검포에서는 선창횟집 등이 맛집으로 통하는데, 실치회무침, 실치시금치국, 실치전, 뱅어포 등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실치회'(1인분 1만 5000원)로 판매한다.
실치가 나는 태안반도는 하나의 거대한 산소탱크에 다름없어 쾌적한 봄나들이 코스로 그만이다. 한적한 태안반도 포구에 깃들어 있자면 마음이 한없이 평화롭고 넉넉해짐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바닷가 솔 숲길에 나서면 시원한 갯바람이 몸과 마음을 다 씻어주는 듯 하다. 인근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요즘 화사한 봄꽃의 향연도 한창이다.김형우 문화관광전문 기자 hwkim@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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