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태밭의 감태매기
설이 지나자 이제는 봄이 기다려진다. 하지만 봄을 얘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매서운 칼바람에 주변 풍광이 여전히 잿빛이다. 한겨울에도 봄 느낌 물씬 나는 곳이 있다. 내륙에는 차밭이요, 바닷가는 감태 밭이다. 두 곳 모두 초록의 싱싱함이 생기를 더한다.
특히 '갯벌의 밥도둑'으로도 불리는 감태는 겨울철부터 이듬해 봄까지 우리나라 서해안 청정 갯벌을 초록의 융단처럼 뒤덮어 겨울바다 여정에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그래서 겨울철 감태 산지로 떠나는 여정도 녹차밭 이상으로 괜찮다. 봄을 마중하는 여정이랄까? 뭔가 상큼한 느낌이 입맛을 돋우는 데다, 초록의 싱싱함이 봄기운을 듬뿍 담아낸다.
'가시파래'라는 또 다른 이름의 감태는 갈파래과에 속하는 녹조식물이다. 태안, 서산, 무안, 신안, 장흥 등 서남해안의 청정 갯벌에서 자란다. 쌉쌀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나고 그 향이 뛰어나 '감태(甘苔)'라는 이름을 얻었다.
갓 지은 쌀밥에 감태 한 장을 올려 싸먹게 되면 특유의 맛과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진다. 뿐만 아니라 컬컬했던 목을 말끔히 씻어준 듯 한 개운한 여운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래서 겨우내 껄끄러워진 입맛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별미로 권할 만하다.
감태는 겨울철 별미 해조류인 매생이 와는 좀 다르다. 질감부터가 거칠다. 올이 굵기 때문인데, 향도 한결 짙고, 색상은 밝은 초록빛을 띤다.
감태는 우리 조상들이 오래 전부터 애용해 온 겨울 별미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모양은 매산태(매생이)를 닮았으나 다소 거칠고, 길이는 수자 정도이다. 맛은 달다"고 적고 있다.
국내 대표적 감태 산지로는 충남 태안 가로림만이 꼽힌다. 가로림만은 풍부한 어패류, 해조류가 자생, 양식되는 수산자원의 보고이다.
태안 가로림만에서도 최대 감태산지는 이원면 사창3리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 저수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차는 갯마을이었지만 이제는 간척농지가 펼쳐진 상전벽해의 땅이 되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태포(苔浦)'. 감태가 많이 나는 포구라는 뜻이다. 마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수백 년 동안 갯벌에 나가 감태를 맸다고 말한다. 아홉 살 때부터 감태를 채취하기 시작해 65년이 넘도록 뻘밭을 누볐다는 한 할머니는 "젖만 떼면 다들 뻘로 나갔는데, 장화도 없던 시절, 감발치고 짚신 신고 얼음장 같은 갯벌에 그냥 나갔다"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겨울철 사창리 앞 갯벌에서는 목가적 풍광의 감태 수확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노동 현장은 보기와는 딴 판이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 북풍한설 피할 데 없고, 잠시 앉을 곳조차 없는 뻘밭에서의 중노동이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감태 채취는 얼핏 쉬워 보이지만 간단치가 않다. 밑에 것은 질겨서 뿌리째 뽑지 않고 부드러운 윗부분 것만 조심스레 뜯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창리 감태가 명품 대접을 받는 데에는 나름의 비결이 있다. 바로 민물 세척이다. 옛 부터 이 마을 '찬샘'이라 부르는 옹달샘에서 졸졸 흐르는 맑은 물로 감태를 떠야 모양이 고르고 건조 후 감태 발에 달라붙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는 게 동네 사람들의 설명이다. 샘물의 철분량이 적당하기 때문이란다.
세척을 마친 감태는 물감태로 포장해 냉동보관하거나 건조를 시킨다. 감태 김은 발로 얇게 떠서 밖에 널어 자연 건조시키고, 무침용으로 쓸 감태는 두툼하게 말린다. 감태를 말리면 단맛이 더해진다. 겨울철 사창리에서는 동네 어귀부터 양지 바른 곳에 감태 말리는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감태는 주로 무침으로 많이 먹는다. 감태와 무채를 섞어 새콤달콤하게 무쳐낸다. 산지에서는 감태김치도 담궈 먹는다. 조선간장, 참기름, 다진 마늘과 생강, 고춧가루, 멸치액젓, 깨 등을 넣고 버무린 후 사나흘 숙성 시킨 뒤 상에 올린다. 밀가루 반죽에 섞어 부쳐 먹는 감태 전도 맛나다. 밥도둑 감태 김은 굽지 않고 그대로 밥을 싸 먹는 게 일미다. 구우면 쉽게 타거나 자칫 쓴맛이 돌기 때문이다. 김형우 문화관광전문 기자 hwkim@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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