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묵구이
11월 하순, 겨울의 초입이다. 단풍이 질 무렵, 이젠 겨울바다의 낭만이 부른다. 바다의 매력은 '툭 트임'이다. 갑갑한 일상탈출을 기대한다면 차가움 속에 펼쳐지는 망망대해의 장쾌함을 찾아 떠나볼 법하다. 쪽빛 바다와 하얀 포말의 청량감을 담아내는 동해안 일원은 온천욕-해돋이와 함께 하는 초겨울 미식거리도 풍성해 '맛 기행'의 최적지가 된다.
이무렵 강원권 동해안 최고의 별미거리로는 '도루묵'을 꼽을 수 있다. 비록 폼 나는 어종은 아니지만 추억의 맛을 지닌 그런 녀석이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포구 주변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것들을 굽고 끓여 먹는 맛이 각별하다.
강원도 속초, 양양, 주문진, 삼척 등 산지에서는 도루묵이 얕은 바다의 바닥이나 바위틈에 산란하기 위해 연안으로 몰려오는 11월, 수심 10m 안팎에서 잡히는 '알배기' 도루묵을 제일로 친다. 몸에 영양을 비축해 맛과 영양이 최고조에 이르고, 무엇보다 쫀득하게 씹히는 도루묵 알 때문이다. 도루묵은 잡아온 즉시 싱싱한 상태로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잡은 지 오래되거나 냉동을 하게 되면 알이 굳어져 맛이 떨어진다. 알이 실하게 밴 것들을 굵은 소금 흩뿌려 석쇠에 구워주는 게 별미다. 간이 살짝 밴 야들야들한 속살과 잘 익어 쫄깃한 알을 터뜨려 먹는 재미가 독특하다. 또 둥글납작한 냄비에 무나 감자를 깔고 얼큰 달큰 칼칼하게 찌개로 끓여낸 것도 밥반찬, 술안주로 그만이다.
요즘 속초, 주문진 등의 포구를 찾으면 싱싱한 도루묵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1만 원에 도루묵 15~20마리를 담아주니 아주 푸짐하다. 즉석에서 굵은 소금 뿌려가며 연탄불에 노릇노릇 구워 먹는 맛도 일품이다. 미식기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추억의 맛 그 자체다.
이처럼 저렴한 도루묵이 귀한 때도 있었다. 30~40년 전엔 도루묵의 알이 원폭 피해자들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일본 수출 길에도 올랐다. 게다가 온난화 영향으로 잡히는 게 예전만 못했으니 귀하신 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자에 들어 어획량도 늘고, 일본 바람도 잦아들어 도루묵은 다시 말짱 '도루묵'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루묵'이란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분분하다. 그중 정설에 가까운 게 임금님 관련 스토리다. 단지 그 주인공이 선조, 태조 등 불확실할 따름이다. 임금이 피난을 떠나 맛보게 되었다는 설이 그럴싸하게 전해오는데, 그러자면 선조임금이 맞을 성싶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이 오랑캐 침입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동해안지역이었는데, 임금은 이곳에서 묵(묵어 또는 목어)이란 생선을 맛봤다. 이 맛에 반한 임금은 이를 '은어(銀魚)'라 부르도록 했다. 임금이 하사한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묵은 한순간에 귀한 몸이 됐다. 뒤에 궁궐로 돌아온 임금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은어'를 잡아오게 했다. 하지만 피난길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묵으로 부르게 하면서 '도루묵'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 얘기가 다소 설득력이 있는 게 옛날에도 도루묵을 '환목어'(還目魚)라 불렀던 기록이 있다. 조선 인조 때 문신 이식은 강원도 간성군수로 좌천됐을 때 자신의 처지를 도루묵에 빗대어 '환목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도루묵이란 이름은 돌메기나 돌목 따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많다고도 주장한다. 바위나 돌이 많은 바닥에서 주로 사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광스토리텔링 차원에서는 재미없는 풀이다.
도루묵 어원을 둘러싼 무성한 말들이 결코 중요하지는 않다. 이무렵 도루묵 그 자체가 맛나기 때문이다. 김형우 문화관광전문 기자 hwkim@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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